기원전 2,333년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형성되면서 본격화되어 정복전쟁이 활발하였던 삼국시대에 크게 발달하였다.


고구려는 활쏘기와 검, 창과 같은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고, 백제는 백제금동대향로의 인물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다양한 맨손무예를 연마하였으며, 신라에 서는 수박, 기마, 덕견이, 깨금질, 씨름 등의 여러 맨손무예가 성행하였다.

삼국시대 맨손무예

고구려 (37B.C ~ 668A.D)
고구려는 상무정신의 기풍이 높았던 국가였다. 당시 국립 교육기관이었던 경당에서 교육받던 청소년이나 조의 선인 등의 무사단은 활쏘기뿐만 아니라 검과 창 같은 무기를 다루는 기술을 연마하였으며, 씨름과 수박 같은 맨손무예도 수련한것으로 추축하고 있으며 무용총 및 그 밖에 벽화에서 두 장사가 겨루기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오늘날의 태권도 겨루기와 비슷하며 이것은 고구려 시대에도 분명 지금과 유사한 형태의 맨손 겨루기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백제 (18B.C ~ 660A.D)
백제의 맨손무예는 1993년에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인물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인물은 향로 몸체의 연꽃잎 상단에서 확인되는데, 왼쪽 팔은 펴고 다리는 구부려 힘과 긴장감이 느껴지는 역동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다.
백제인들 역시 고구려인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무예를 연마하였고, 분명 오늘날의 태권도와 유사한 맨손무예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신라 (57B.C ~ 936A.D)
신라에는 다양한 형태의 맨손무예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용강동고분에서 출토된 무사용을 통해 뒷받침 할 수 있다. 세 개의 무사용은 진골, 신분으로 추정되는 피장자의 호위무사로 볼 수 있는데, 3인 모두 각기 다른 겨루기 자세를 취하고 있어 이 당시 수련했던 맨손무예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용강동 병사들은 손 모양이, 지금 태권도 등의 무예에서 말하는 바깥막기 식의 동작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당시 맨손무예의 단위 동작을 세심하게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맨손무예

조선시대 맨손무예 (1392A.D ~ 1945A.D)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맨손무예 수박이었다. 수박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도 계속 존속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박은 수박(手搏), 수박희(手搏戱), 수박(手拍) 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1410년(태종 10년)부터 1467(세조 13년)까지 모두 열일곱 차례에 걸쳐 나타난다.

조선 중기에 출간된 『권보』,『무예제보번역속집』,『무예신보』, 『무예도보통지』 등에 그 구체적인 내용이 나타나 있는 맨손무예인 ‘권법’은 왜군과의 전투에서 큰 효력을 발휘한 낭선, 장창, 당파, 등패 등과 같은 단병기를 익히는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초무예였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조선 조정은 군사무예로서 권법의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 조정은 무예 수련을 위한 기초훈련으로 조선 전기에 널리 행해지던 수박희 대신 명나라 병사들로부터 배운 권법을 수련하게 하였다. 하지만,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을 보면, 갑을상부(甲乙相負)라 하여 2인이 씨름하듯이 서로를 제압하는 기법들이 나타나고 있어, 명 군사부터 배운 권법을 우리 고유의 무예와 접목시켜 더욱 발전시켰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1798년 이만영이 편찬한 재물보에는 슈벽, 탁격, 씨름 등이 맨손격투기의 명칭이 나타나, 민간에서 다양한 맨손무예가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무예가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었음은 유숙의 (대쾌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대쾌도)에는 양팔을 넓게 벌리고 마주 대하고 있는 인물들과 허리춤을 잡고 힘을 겨루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다는 데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모습으로 짐작된다.

광복이후 태권도의 발전

개화기에는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외래무예의 유입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총독부의 규제와 탄압으로 인해 택견이나 수박과 같은 우리 고유의 무예 수련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이 때문에 중국무술과 일본무도를 우리무예와 함께 복합적으로 수련하게 되었으며 한국무예의 변용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마침내 1961년 9월 14일 태권도 통합 창립위원회가 조직되어 1962년 6월 25일 대한태수도협회가 대한체육회 가입함으로써 태권도계를 대표하는 공식적인 단체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듬해인 1963년 10월에는 처음으로 제4회 전국체육대회 정식종목이 되어 태권도가 정식 체육단체가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그 후, 1965년 8월 5일에 대한태수도협회는 비로소 ‘대한태권도협회’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오늘날의 태권도

태권도를 세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태권도계의 통합이 가장 우선된 과제였고, 태권도의 각 관들은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의 도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1972년 11월 30일 ‘국기원’은 대한태권도협회의 중앙도장으로서 건립되었으며 태권도 전통의 유지 계승과 태권도를 세계인의 운동으로 보급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1980년에는 대학 내에 태권도학과 개설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50여개의 대학에서 태권도 관련 학과(전공)을 개설하여 태권도 학과의 발전을 위한 기틀을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식과 정보가 기반이 된 21세기 인류사회에서 태권도의 새로운 위상을 탐색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미국, 캐나다, 호주, 우즈베키스탄, 중국 등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도 태권도를 이미 전공으로 개설하였거나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하여 태권도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태권도가 시범 종목으로 참가할에 따라 태권도의 세계화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1994년 9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103차 총회에서 한국의 국기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2004년 아테네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12년 런던올림픽, 2016년 브라질올림픽의 정식종목의 채택이 되어 한국어가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와 함께 올림픽 경기의 공식용어가 되었다.

현재 태권도는 올바른 인격함양과 건강한 신체능력을 기르기 위한 운동으로써 201개국 8,000만 태권도인이 수련하는 세계인의 무예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었다.